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구원의 시 #0

Prologue / 랠리



Prologue

 2부 완결편과 이어집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한 이래

사악한 기운이 만물을 덮은즉

이에 대적할 자를 세우고자 하노라.

 



신은 오래도록 상심에 빠졌다. 

사랑하는 천사 정국은 그의 두 번째 오점이 되었다. 일곱 개의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이며 자신을 찬양하던 정국이 타락의 길을 선택하여 스스로 제 날개를 꺾었다. 인간의 생을 부여하며 자유의지를 주었던 것이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마지막 순간에 베푼 자비마저 거부하여 스스로 형벌의 굴레에 걸어 들어간 천사라니. 그건 창세 이래 두 번째로 큰 사건이었다.

한편 의문을 가지는 천사들도 있었다. 루시펠처럼 소멸할 줄 알았던 정국이 지민과 함께 인간의 생에 떨어진 건 뜻밖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신에게 반(反)하는 죄의 형벌을 전시하는 것은 지민 그 아이로 족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함부로 정국의 이름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금기였다. 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모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의 뜻에 의문을 품는 것 역시 죄에 해당하므로 그런 자들은 소리 없이 천상에서 사라졌다.

비어 있는 천사장 자리에 앉을 자는 과연 누구인가. 일곱 개의 선을 다 가지지 못한 천사들은 감히 그 자리를 넘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루시펠과 정국마저 그 끝은 파멸이었으니, 육중한 자리의 무게를 실감할 수밖에. 신이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그저 다음 명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

.

.



“…끝났나요?”

책방의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가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은 찰나였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정한 유한한 시간의 개념일 뿐, 지민은 초 단위로 흐르는 짤막한 시간에 영겁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스르륵. 스산한 기운과 함께 정국의 발아래로 검은 안개가 낮게 깔린다. 이내 썩은 나무뿌리와 같은 형체가 그의 발목부터 정강이까지 천천히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쉬이익. 쉬이익. 그 형체는 연기와 같았으나 소름 끼치는 소리는 뱀의 그것과 비슷하다. 지민은 흰자가 보일 만큼 눈을 크게 뜨고 겁에 질린 채 얼어붙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제 앞에 서 있는 정국은 마치 석상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까만 구슬 같은 그의 눈동자가 잠시도 닫히지 않는 것을 보며 어쩌면 시간이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의문의 형체가 그의 전신을 휘감는다. 말초부터 중추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그의 몸에 스며들어 간다. 마침내 뱀과 같은 것이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갔을 때, 정국의 흰 목덜미에 까만 줄기가 돋아난다. 줄기는 징그럽게 펄떡이며 스스로의 크기를 키워간다. 얇은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혈관처럼 요동치다가 팍 튀어나왔으며, 지지직 살가죽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목 줄기에서 턱으로, 턱에서 뺨으로, 계속해서 번져가기도 한다. 아름답던 정국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까맣게 물든다. 스슥. 요사스러운 뱀에게 꽁꽁 묶인 채, 그의 피부 이곳저곳에는 시커먼 문양이 온통 자리한다.

“…….”

내내 움직임이 없던 정국의 눈꺼풀이 천천히 닫힌다. 지민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의 얼굴을 뜯어본다. 잠시 뒤 정국의 커다란 눈이 팟- 뜨였다. 눈머리에서 눈꼬리까지 이어지던 호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형용할 수 없는 안광이 무시무시하게 뿜어져 나온다. 정국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다.


악(惡)

사악한 기운의 만연.

정국의 모습은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지민은 제 귀를 틀어막았다. 조용한 책방 안에 음습하고 오싹한 소리가 채워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웃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우는 소리 같기도 하다.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소를 띠고 있는 정국의 얼굴은 검게 변한 채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데, 그 모든 소음과 기운이 정국에게서 시작되는 것만 같다.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간다.

지금 이것이 분명히 환영임을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예지일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제 아버지 루시펠이 보여주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괴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지민은 이 환상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마구 털어낸다. 그러나 자신이 이 모습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아야 하는 거라면, 그 해답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끔찍한 광경이 사라지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다.

 

가여운 나의 아이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로 하여금 제게서 연속되는 불행의 원유를 깨닫거든, 

그제야 이 책은 소명의 재이며 동시에 구원의 씨앗이 될지어다.

 

그 순간 아비의 책에 쓰여 있던 글귀를 다시금 떠올린다.

 

소명의 재. 구원의 씨앗.

구원…… 구원.

 

완벽한 천사였던 정국의 존재, 반 천사인 지민 자신의 존재, 그리고 악마라고 불러도 될 만큼 끔찍한 정국의 환상까지. 루시펠은 그것을 모두 알게끔 했다. 천사장이었던 그가 소멸하기 직전까지 애써 이 책을 자신에게 남겨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 아들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래. 그것이다. 모든 목적은 결국 하나를 향하고 있었다.

 

구원.

신께 구원받을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다.

 

 

.

.

.

 

 

 

신의 음성이 엘루이를 불렀다.

참으로 가련한 아이들이로구나.

엘루이는 그의 말이 정국과 지민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의 발밑에 엎드려 잠자코 다음 음성을 기다렸으나, 이미 그의 자애로운 성품을 알고 있는 엘루이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지기 시작했다. 신의 가장 가까이에서 곁을 지켜왔던 전사로서 신의 성정과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굴레에 떨어진 정국이 생을 반복하면서 지민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의 심정을 떠올렸다. 부러 만나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짝을 찾아 반드시 만났다. 소멸하기 전 모든 것을 예지한 루시펠이 제 아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두었다. 엘루이는 그것을 지켜보며 신의 마음을 감히 예측했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신은 자신의 피조물을 가엾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용서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회개한다면 말이다. 죄인마저 사랑하여 구원하는 것 또한 신의 성품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타락한 천사장 루시펠이 제 아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을 제법 흡족한 눈으로 바라봤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수많은 천사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던 형벌을 거두려면 그만큼의 명분이 따른다는 것이다.

악한 자가 그 아이를 먹이로 삼는구나.

엘루이 역시 알고 있었다. 비어 있던 천사장의 자리를 채우려 했던 것도 악의 기운이 드세졌기 때문에 그에 대적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타락했던 천사 루시펠은 소멸하였기에 악인이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국은 다르다. 본래 일곱 개의 선을 가진 천사였던 정국의 속성은 악한 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런 자가 인간의 생을 살고 있으니 악인에게는 아주 탐스러운 먹잇감인 셈이다. 스스로 타락을 택한 천사를 완전한 악으로 지배할 수만 있다면 신에게 맞설 힘이 생긴다고 믿는 것이다.

“악이 그 아이를 점령하는 것이 최초의 명분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하는 것이 명분이라….

“시작과 끝을 이미 알고 계시니, 이 역시 뜻대로 하옵소서.”

정국과 지민의 자유의지가 반복된 생에서의 사랑을 이끌었으니, 지민이 그를 악으로부터 막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본래 완전한 인간이 아닌 이들이기에 악을 감당하는 것은 또 다른 시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까지 신의 예정 안에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엘루이가 예지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알 수 없기에 언제든 그의 뜻을 받들 준비를 할 뿐이다.

 

저들이 천사로서 심판에 이르게 하라.

 

짧은 명령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엘루이는 엎드려 있던 몸을 조용히 일으켰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신의 음성에 순종하여 바삐 몸을 움직였다. 그의 커다란 날개가 조용히 펼쳐지며 천상을 가로질러 날아올랐다. 천군들은 위엄이 느껴지는 엘루이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신께 기도를 올렸다.

 

 

.

.

.

 

 

“아!”

번쩍, 지민의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들이 섬광처럼 따갑게 박혔다. 지민은 제 관자놀이를 짚으며 헉헉거렸다. 눈앞에 보이던 정국의 환영이 스르르 사라져간다. 악마 같던 그의 얼굴이 여러 모습으로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이전 생에서 보았던 모습도 있고, 아직 보지 못했던 모습도 있다. 그건 분명히 앞으로 다시 만날 생이리라. 목덜미에서 시작된 나무뿌리 같은 검은 줄기 문양이 차츰 지워진다. 이 역시 환영이다. 본래의 정국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정국의 모습. 낡은 책방에 찾아온 순수한 얼굴의 정국으로.

누군가가 알려준 것만 같이 머릿속이 맑고 선명하게 정리되어 간다. 구원에 이를 방법. 방금 제 눈앞에 보였던 환영은 앞으로의 생에서 정국이 물들어갈 모습이 분명하다. 뱀과 같은 형체는 분명히 악이다. 악이 그를 잠식하려고 하는 것이다. 막아야 한다. 그걸 막는 것이 소명이 아닐까.

아버지, 당신이 내게 알려주고 싶은 게 이것인가요.

목덜미의 문양을 기억해야 한다. 지민은 정국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반 천사로서 영의 눈을 뜨게 되었으니, 다음 생에 다다라도 잊어선 안 된다. 반드시 기억해낼 것이다. 지민은 가엾은 이 남자와 자신을 이 형벌의 굴레에서 반드시 꺼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다. 처음 그를 시험한 것이 7대 죄악이었으니, 이제는 악한 것들이 그를 같은 방법으로 먹어치우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검은 문양은 죄악의 낙인이다. 

그것을 반드시 지워낼 것이다.


지민은 루시펠의 유언을 기억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에게 또다시 7번의 생이 주어졌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7대 죄악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7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17
구원의 시 #1